2005년, 한 오페라 잡지에 뮤지컬 업계 전체를 뒤집을 만한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거기엔 안무 대신 춤만이, 정교한 노래의 형식미 대신 얄팍한 반복과 계산만이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브로드웨이 뮤지컬엔 그 어떤 혁신과 기술도 남아 있지 않으며 그저 관객들이 뮤지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맞춘 기계적인 공신만이 남았다.’라고 말하며 2000년 이후 브로드웨이의 대표적인 성공작 <헤어스프레이>, <나쁜 녀석들>, <프로듀서> 등을 가짜 뮤지컬이라고 공격한 이 글은 이 후 언급된 작품의 작곡가들의 대응으로 한 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브로드웨이는 죽었다고 과감히 말하며 논쟁에 불을 지핀 장본인은 바로 마이클 존 라키우사. 미국의 젊은 뮤지컬 작곡가이면서 손드하임의 계승자라 불리는 그는 대중성에 영합하는 작품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소 난해한 구성과 주제로 인간 내면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 <씨왓아이워너씨(See What I Wanna See), 이후 ‘씨왓’으로 명명>역시 뮤지컬에 대한 그의 철학을 여실히 반영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 2막, 3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작품은 얼핏 보면 이질적인 이야기들의 결합 같지만 한 가지 주제 안에서 치밀하게 이야기를 집결시킨다.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케사와 모리토>, <덤불 속에서>, <용>을 원작으로 하여 <케사와 모리토>, <라쇼몽>, <영광의 날>이란 소제목을 두고 현대적으로 각색한 뮤지컬 <씨왓>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뮤지컬보다 참신하고 독특하며 또한 진지하다고 감히 말한다. 지금까지 뮤지컬의 ‘일반화된 공식’이 가벼운 소재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관객에게 ‘웃음과 흥미’를 주는 것이었다면 이 작품은 그 모든 것을 가차 없이 깨버린다. 이 작품의 소재는 결코 가볍지 않고 그 주제 또한 가볍기는커녕 외려 무겁다. 관객은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작품에 몰입해야 하고, 웃음의 난사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흘러나오는 음악 또한 귀에 감기는 쉬운 멜로디가 아닌 낯선 음들의 결합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낯설음은 불협화음의 미학을 만들어 내고, 독특한 음악 어법을 창출해 낸다. 그렇다. <씨앗>의 음악은 대사와 절묘하게 결합되어 상당히 묘하면서 매력적인 음악‘語法’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음악들은 대사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간소한 무대 공간을 확장시켜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관객들은 이전의 뮤지컬에서 만날 수 없었던 참신한 음악과 대사의 조화 속에서 <씨앗>만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매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간소한 무대장치와 배우들의 동선, 그리고 사방이 뚫려 있는 무대 공간이다.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 책상과 의자 몇 개, 그리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직선 혹은 X형의 선들은 무대를 간결하게 하면서 3개의 에피소드를 담아낼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창출한다. 아울러 이와 같은 무대는 결국 보는 사람의 방향에 따라 그리고 각도에 따라 사물은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 즉 진실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내는 속에 있을 뿐,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확실한 것도 없다는 작품의 주제를 관객으로 하여금 몸소 체험하게 한다. 사방이 뚫려 있는 무대 역시 배우들의 등퇴장 및 퇴장 이후의 감정선까지도 살필 수 있어 관객의 시선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한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진실’이라는 문제를 탐구하는데 주력한다. 세 가지의 에피소드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결국 그것을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때론 상징적으로, 때론 노골적으로, 그리고 때론 진지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이 작품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들어온 모든 것, 보아온 모든 것, 그리고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회의해야 할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은 것과 내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은 결국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일 뿐, 그것은 다른 이들의 시선 속에서는 전혀 다른 실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작품의 상징적 표현과 다소 무거운 주제 때문에 공연이 난해하게 느껴질 수 도 있으나, 이 작품은 결코 우리가 전혀 모르는 문제,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이 자신의 눈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삶에 있어, 영원한 진리도 완벽한 해답도 없다는 것 역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 당연한 진리를 새롭고 독특하게, 그리고 뛰어난 연출 기법으로 풀어가고 있기에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다. 특히 1막 <라쇼몽>에서 남편의 시선을 진술하면서 인물의 외면과 내면, 그리고 실제와 허상을 남편과 영매 두 사람의 몸짓을 통해 보여준 것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출 방식 또한 매우 감각적이면서도 심오하였다.
뮤지컬 <씨앗>은 과연 뮤지컬의 혁명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뮤지컬이 나아가야할 또 다른 방향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 작품을 가장 지적인 뮤지컬이라 일컫기도 하지만, 필자는 이 작품을 가장 새롭고 독특하며 깊이 있는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대중성과 흥행성을 논하기 전에, 작품은 그것으로서 나름의 색깔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씨앗>은 다른 어떤 작품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자신만의 색깔과 매력을 가진 채 깊이 있는 이야기를 개성 있게 풀어내고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가지는 독립적이 이야기들도 재미가 있지만, 그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체 스토리인 <씨앗> 역시 살아가면서 한 번쯤 반드시 고민해야 하는 깊이 있는 철학적 물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3가지의 에피소드가 어떻게 하나의 주제 안에서 배치되고 움직이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도 작품 관람 후의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